диалоги 7 : 좁은 문
S/
찾으신 종이를 가져왔습니다. 도련님.
V/
앞으로 내 방에 들어올 때는 인사를 하기 전에 문부터 닫아.
S/
앞으로. 방문을 닫을 날이 많을까요. 잊지 않고 기억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V/
너는 늘 네게 허락된 것 이상으로 한 발짝 앞서 나가는 경향이 있어. (턱짓으로 서 있을 자리를 가리켰다. 자신이 앉아 있는 곳에서 서너 발자국 떨어진 카펫 위다.) 좋지 않은 태도지.
S/
(가리킨 곳으로 가 선다. 이 정도.) 여기까진, 허락이 된 것일까요.
V/
(의도한 곳에 가 선 것을 확인한다. 대답을 해 주는 대신, 손가락을 들어 제 아랫입술께를 가리켰다. 의도가 명백한 제스처였다.) 상처가 빨리 낫는 편인가?
S/
(마른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놓았다.) ... 상처엔 익숙합니다. 제 상처를 확인하려고 부르신 것일까요.
V/
물론 아니야. (가볍게 일축해 버리고는 등을 바로 세워 네 쪽을 바라보았다. 낡은 옷가지, 굽은 어깨, 어두운 낯.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다.) <이반 뇌제 이야기>를 읽었지? 편지들을 외운 것처럼, 그 글도 전부 외우고 있나.
S/
물론입니다. 도련님. (물음에 말들이 막힘없이 우루루 쏟아진다.) 묻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황제는 어떻게 되었죠. 영원히 편히 잠들지 못했나요. 매일 밤 황제가 죽인 이들이 찾아왔으며, 새벽이 밝을 때까지 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까. ... 그 황제는 미치지 않았습니까.
V/
사실은 그 뒤를 쓰고 있어.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방 안을 한 바퀴 빙 돌았다.) 역사 속의 이반은 사랑하는 아들을 자기 손으로 때려죽인 다음 절망에 빠지지. 황제는 어느 작은 수도원으로 들어가 사제가 되길 자청해. 그리고 거기서 죽음을 맞이하고. 하지만 그건 공평하지 않아. 꽃에 물이, 땅에 거름이 필요하듯 죄에는 벌이 필요해. 그저 고독과 회한 속에서 죽어가는 것만으로는, 이반의 손에 스러져간 수많은 이름들의 복수가 되지 못하지. 아들 이반을 포함해서 말이야.
S/
(눈을 굴렸다. 선 자리에서 고개를 모로 꺾는 것만으로는 모자라 몸을 틀어 당신을 좇았다.) '죄에는 벌이 필요하다.' 네. 고독과 회환보다는, 고통과 절망이 어울립니다. 하지만, 도련님. 황제의 목숨은 단 하나입니다. 스러져간 수많은 목숨들을 다 갚기엔 겨우 하나론 부족하지 않은가요.
V/
"죽어가는 황제의 침실. 문 앞에 선 하인이 이렇게 말한다. 그의 목숨은 단 하나입니다. 죽은 이들의 원수를 다 갚기엔 겨우 하나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나쁘지 않아. (천천히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쳐 놓고는, 의식처럼 다시 방 안을 맴돈다.) "사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일은 죽음 이후에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제들 가운데는 죽음 이후에 속죄하는 방법에 대해서 공부하는 자도 있습니다."
S/
(의자의 등받이에 시선을 잠깐 두다 다시 느린 걸음을 걷는 당신을 바라본다. 카펫 위, 한 자리에서 몸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 하면 그 연구와 공부는 끝을 보았나요. 결과가 있습니까. 황제를 답을 알 수 없는 연구에 끌어들이실 셈입니까. 죽음 이후에 속죄가 필요하다면, 대물림은 어떠한지요. 비단 핏줄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수많은 자들이 그 업을 지는 것입니다. 그리해야 이름들의 숫자가 비슷해지지 않을까요. 황제의 아들이 아비 손에 죽은 것 또한 그 죄의 탓일지도 모릅니다.
V/
그 연구가 끝을 보았냐고? 알료샤에게 물어봐. 그 애는 수천 년째 이어지고 있는 이 지루한 학문에 자진해서 뛰어들었어. (짜증을 내듯 쏘아붙였다. 곧 목소리는 누그러든다.) 하지만 네 제안은 일리가 있어. 이 땅에 '이반'이 그렇게 많은 이유도 황제의 죄를 나눠 갚기 위해서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면 너 역시도 이 연좌제의 사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 이 저택 주인의 이름은 표도르 파블로비치 까라마조프야. 말인즉슨 그의 아비 이름이 파벨이란 뜻인데. 이 우연을 어떻게 생각하나, 파벨?
S/
(음성이 날카롭게 튀어올랐다.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가, 답은 알기에 굳이 짚어보지 않기로 한다.) 우연을 가장한 죄를 제가 뒤집어썼다고 말하시는 건가요. 파벨 표도로비치 스메르쟈코프에서, ... 표도로비치는 모두가 수군거리기만 할 뿐,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이름입니다. 도련님께서도 마찬가지 아니신가요. 또 하나의 불유쾌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V/
하지만 너는 불유쾌한 우연을 귀하게 여기는 부류의 인간이지. (무감한 낯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게다가 넌 너와 내가 '형제를 탐하는' 면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해 왔고. (또 한 걸음…… 서로의 멱살을 낚아챌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진다.) 네 주장엔 커다란 모순이 생기는군. 네가 표도로비치가 아닐 경우. 너와 내 사이를 규정하는 건 주인의 아들과 그 하인, 그 정도가 되겠지. 네가 나를 탐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같은 죄를 짊어진 자'끼리의 고민은 나눌 수 없어. 반대로 네가 정말로, 만에 하나의 '불유쾌한 우연'으로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하자. 이 때 이어지는 문제들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 자, 어느 쪽이야.
S/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다가서는 것에 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마른 입술을 혀를 내어 축이며 답을 고르는 눈이 절로 매서워졌다. 지독하리만큼, 무감한 낯에 상처를 새겨 넣듯이 그 눈으로 얼굴을 샅샅이 훑어내리다 입을 열었다.) 같은 죄를 짊어질 자가 필요하시다면 저는 도련님의 형제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형제입니다. 우리는 피를 나누었으니까요. 공범이 필요하십니까. 해서, 이어져 있길 바라십니까. 제 이름에 대한 외면은 이제껏 제 몫이 아니었습니다. 늘 외면해오던 건 도련님들이 아니십니까. 이제와 제가 선택한다한들 무엇이 달라집니까. 도련님. 미루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V/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고 해서 머릿속의 생각까지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야. (다시 한 걸음 물러선다.) 또, 같은 벌을 받았다고 해서 그 죄의 무게가 동일한 것도 아니지. 경전 속 이야기를 떠올려 봐. 신의 아들과 나란히 못박힌 두 명의 죄수가 있었지. 스메르쟈코프, 내가 뭘 미루고 있다는 거지?
S/
같은 생각, … 도련님과 알렉세이 도련님처럼 말인가요. (물러나는 것에 이번엔 그만큼 다가선다.) 신의 아들은 처형대에 오른 그 순간에도 누군가를 낙원으로 이끄셨다 하지요. 복음을 이해한 자 말입니다. 도련님. 저를 죄인이라 부르십시오. 그리하고 싶으시다면 말입니다. 죄인을 고발하고 벌을 받게 하십시오. 저는 아무것도 발설치 않을텝니다. 하지만, 종이를 영영 잃으시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것도 쓰지 못하며 당신의 사유는 어디에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하나 귀 기울이지 않을 테니, 증거 또한 남지 못할 것입니다. 저를 어디로 이끄실 겁니까.
V/
그래, 나와 료셰니카처럼. 우린 같은 뿌리에서 나와 다른 방향으로 자라난 가지나 다름없어. (순순히 수긍하는 얼굴에는 조금의 유감도 묻어나지 않았다. 바짝 다가온 가슴께를 손으로 짚어 밀어낸다.) 내 생각이 어디에도 남지 않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나? 누군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사유하는 것을 그만둔다니, 어리석은 짓이야. 스메르쟈코프, 잘 들어. 내 말은 다 헛소리야. 그러니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고, 글을 읽지 않는대도 난 계속 떠들어 댈 거야. 어디로 가고 싶지? 뭘 원해. 너에게도 의지란 게 있나?
S/
떠들어댐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 몸을 가볍게 밀어내는 손을 잡아 당긴다.) 도련님의 헛소리엔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 가득 찬 소리 중 그것만이 저에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네. 저의 의지로 들은 것입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물으셨죠. 더 많은 소리를 원합니다. 당신을 원합니다. 도련님.
V/
그걸 너에게 말해 주어야 할 의무는 없어. (완력 면에서는 상대가 안 된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제 성이 찰 때까지 놓지 않을 테지.) 거짓말이야. 넌 나를 원하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것들을 원하는 거니까. 네게는 없는 것, 그래. 이를테면 제대로 된 이름이라던가.
S/
원한다면 주실 겁니까. (순순히 내어주는 손을 가만히 내려보다 그것을 들어올려 제 뺨을 부비곤 내려놓는다.) 아니시라면, 앞으로 그 물음은 쉽게 하지 마십시오. 제가 도련님에게서 무엇을 원하는 지 확인하시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V/
감히 조언을 해?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말씨와는 달리 표정은 영 평온하다.) 내가 무얼 묻고, 어떤 것을 궁금해하든 네 녀석과는 관련이 없어. 내 사유에 대한 책임은 다른 누가 아닌 내게 있으니까. 난 너와 달리 우연 따위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려는 거야.
S/
관련이 없나요. 제가 착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이따금 꽉 물어대는 어금니도, 흔들리는 시선도, 높아지는 목소리도 전부 다 저와는 관련이 없겠죠. 모든 것은 도련님의 책임이라면, 제가 무슨 답을 고하든 그 또한 질문한 자에게 책임이 있는 건가요.
V/
꼭 내가 책임을 진 적이 없다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목 둘레를 꼭 죄고 있던 타이를 끌렀다. 익숙한 동작으로 셔츠 깃을 잡아당기면, 드러난 살갗이 깨끗하다. 보란 듯 턱 아래께를 가리켰다.) 난 이미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모르는 척을 하지는 않겠지.
S/
(벌려진 셔츠 깃 사이로 드러난 흰 목을 바라보았다. 그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아 손을 뻗어 울대 주변을 감싸듯 매만졌다. 표정은 무엇도 드러내지 않으면서 마른침을 억지로 삼키는 것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다 나으셨나 봅니다. 계속 궁금했는데.
V/
오래 걸렸어. (부르트고 갈라진 손끝이 턱과 목 주변을 맴도는 것을 느꼈다. 몸은 고통을 기억하고 있다. 혀뿌리가 단단해지고, 뺨과 턱의 근육이 바짝 긴장한다.) 말해 봐. 너도 꿈을 꾸나? 밤에 말이야.
S/
그런가요. 직접 보았으면 좋았을텐데. 그럴 수 없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손가락 끝으로 목선을 따라 내리다가 곧 손을 거둔다.) ... 저의 꿈에 도련님이 나오는 지가 궁금하신 겁니까.
V/
……. (자신은 뭘 해온 걸까, 이런 녀석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지금부터 어떤 일을 하려는 걸까.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사유는 눈덩이처럼 점차 그 덩치가 불어나 어딘가에 부딪혀 깨질 때까지 구를 것이다. 마침내 두 눈을 마주보았다. 사금파리처럼 섬뜩한 시선을 느꼈다.) 그래.
S/
(마주한 눈을 한참 바라보았다. 누구 하나 먼저 피하지도 물러서지도 않는 탓으로 서로가 몇 번이나 느리게 깜빡이는 것을 눈에 담았다.) 다른 이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때에도, 꿈 속에서도 도련님의 얼굴은 없습니다. 아, 꿈보다는 의식을 갖춘 상상 속에서 그려보곤 했습니다. 꿈꾼다면 좋을까요. 아니, 꿈이 아니라 깨어나 뜬 눈 앞에 이렇게 도련님이 실제로 계신다면 그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직접 보고, 만지며, 느낄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꿈꾸기를 바라십니까.
V/
(몸 위를 핥고 지나가던 시선을,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꽉 틀어쥐던 손의 아귀힘을, 달군 부지깽이 같던 손길을, 아주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부러 떠올리지는 않는다. 눈을 내리감아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꿈꾸지 마. 그만 나가, 너와 이야기하면 피곤해져.
S/
... 도련님의 꿈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두어걸음 물러나 허리를 깊게 숙였다. 오늘의 종이는 쓸모를 다 한 것이다. 완전히 돌아서 닫힌 방문으로 다가서다 잊은 것이 있단 듯 당신을 돌아보았다.) 아. 그 꿈에 알렉세이 도련님이 아니라, 제가 나온 적은 ... 없나요.
V/
(말끝에서 묻어나는 것은 무엇일까. 기대일까, 망설임일까, 아니면……. 희미한 악의가 형체를 갖추어 분명해진다. 눈앞에 서 있는 그의 밤잠을 망쳐버리고 싶다는, 제가 느꼈던 혼란의 갑절을 되돌려주고 싶다는, 그런 의지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넌 네게 허락된 것 이상으로 앞서 나갈 때가 있다고, 그리고 그건 아주 나쁜 버릇이라고. 스메르쟈코프, 내가 꾸는 꿈은 전부 알료샤에 대한 거야.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지. 거기에 네 자리는 없어.
S/
제가 또 주제를 넘었나요. 말그대로 버릇이니 고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지 않겠습니까.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부디. 오래 전부터 그러했듯 오늘의 밤에도, 앞으로도 도련님의 꿈 속에 제 자리가 없기를 바라겠습니다. 도련님.